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독들의 반란 (문단 편집) == 배경 ==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을 필두로 미 행정부는 전쟁으로 인해 비정상적으로 불어난 군비를 정상적인 규모로 축소할 필요성을 느꼈다. 정확히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집권 3기 후반부터 전쟁 이후 군축을 준비할 수 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미 상원 국방사문위원회에서 활약해 [[군납비리]] 150억 달러를 잡아낸 미주리주 상원의원 트루먼을 높게 평가해 단번에 부통령에 지명해 전후 군축때 트루먼이 역할을 하도록 준비시켰다. 당연히 트루먼은 루스벨트 사후 전쟁을 끝낸 뒤 약속한 대로 군축을 진행해야할 상황이었고 비슷한 시기에 [[미합중국 육군]] 소속의 [[육군 항공대]]는 [[미합중국 공군]]으로 독립하여 위상이 크게 높아졌으며 새로운 전략무기인 [[핵무기]]와 당시 기준으로 핵무기 투발의 유일한 수단이었던 [[폭격기]]를 앞세워 전쟁의 패러다임 변화를 꾀하였다. 가뜩이나 군비를 줄이고 싶은데 마침 공군이라는 좋은 대체제까지 생긴 트루먼 행정부는 공군을 밀어주면서 예산을 많이 잡아먹는 [[해군부]] 소속의 군사집단(즉, [[미합중국 해군|해군]], [[미합중국 해병대|해병대]], [[해군 항공대]] 등)을 대대적으로 감축하기로 결정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육군의 [[육군부]]와 해군의 [[해군부]]로 따로 돌아가던 미국의 국방조직은 둘을 하나로 통합해야 한다는 [[조지 C. 마셜]] 미 육군[[원수(계급)|원수]]의 제안을 계기로 마침내 1947년에 [[국방부(미국)|국방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초대 국방장관은 前 해군장관이던 제임스 포레스탈이 임명되면서 해군이 가져가게 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육군 항공대]]가 끝내 공군으로 독립하여 육군과 해군이 반분하던 미군의 새로운 축으로 등장하였고 트루먼 행정부는 신생 공군을 밀어주며 해군을 대대적으로 칼질하려고 하였다. 행정도 육군과 따로 운영하며 육군에 휘둘리지 않았던 해군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존재에 대해 위기를 느끼게 되었고 트루먼 행정부의 군축을 반대하고 [[항공모함]]을 예로 들면서 해군의 규모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포레스탈은 자신의 출신인 해군을 지지했고 따라서 해군의 감축을 주장한 트루먼과 갈등을 벌이게 되었다. 이러한 결정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미국의 입장을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전쟁에 참전한 미국은 유럽전선을 최우선 지역으로 선정하고 이에 대한 물량공세를 집중시켰다. 알다시피 [[나치 독일]]은 영국과 스위스나 스웨덴과 같은 [[중립국]] 이외의 전 유럽을 점령하고 영국 공략에 총공세를 퍼붓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참전이 결정되기 전에도 자국의 군병력 일부를 '의용군' 형식으로 영국에 파견시켰을 정도로 신경을 곤두세웠고 미국과 유럽은 대서양을 건너면 맞닿은 그야말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의 지척에 위치해 있었으며 [[U보트]]가 미국 동부 연안까지 진출해 집적거리는 사태까지 생겼었으므로 이유를 막론하고 반드시 유럽전선을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했고 이 유럽전선의 주력이 당연히 육군과 육군 항공대였으니 중요성이 높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해군과 해병대가 주력이었던 태평양 전선은 우선 지리적으로 먼 데다[* 핵추진과 같은 장거리 항해능력이 가능한 기술이 개발되기 전이었음을 감안하자. 물론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미 서해안에 대한 경비를 강화하기도 했지만 당시 일본 해군의 상황으로 볼 때 미 서해안까지 진출했을 가능성은 적었거나 없었다는 의견이 우세한 편이다.] 주요 격전지도 대부분 해상이었거나 태평양 부근의 열도 혹은 인근 아시아 지역이었던 관계로 직접적인 피해를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점이 컸으며 무엇보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이 유럽전선에 비해 그다지 중요도가 높지 않다는점도 한몫했다[* 미 병력 일부가 필리핀에 주둔하긴 했지만 그저 수비대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그나마도 많았다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일부 미 육군 항공대 소속 전투기 조종사들도 아시아에 파견되기도 했으나 몇 안되는 인력이었다. 그마저도 [[장제스]]의 요청으로 파견된 인원이었다.]. 태평양이 대서양보다 크고 넓어서 미 본토에 대한 공격에 대해 안전하다는 게 중요한 것인데 대서양은 영미권에선 pond, 즉 '연못'이라는 별칭으로 불릴 만큼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편이다. 오늘날에도 미국과 유럽의 국적 민간 항공사들이 상대 지역을 왕래할 때 [[보잉 767]]이나 [[A330]]과 같은 중장거리 여객기를 주력 기체로 사용하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 지리적 위치로 인해 유럽의 중요성이 컸다. 미국이 아시아를 실질적으로 주목하기 시작한 시기가 1949년 중국의 [[공산화]], 1950년의 [[6.25 전쟁]]과 같이 아시아의 공산주의 확산과 같이 했다는 점을 보면 당시까지는 유럽이 아시아에 우선했다고 봐야 할 듯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